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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활동과 이야기/반크외교대사 1기

[반크외교대사 1기] #1 반크외교대사 워크숍으로 알아가는 동해/독도 역사유적

by société 2016. 12. 16.


반크외교대사 1기  : 세계를 향한 대한민국의 청년들, 독도를 알리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다!




#1 반크외교대사 워크숍으로 알아가는 동해/독도 역사유적

안녕하세요!
한국문화유산 홍보대사 8기에 이은 반크외교대사 1기 활동으로 다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반크외교대사란?

여러분이 꿈꾸는 세계 속 한국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지구촌 변화를 이루기 위한 실력과 열정을 길러
독도왜곡에 맞서 아름다운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청소년과 대학생 대사들입니다.


반크의 교육을 우수히 수료하신 대사님들 중 반크의 15만 회원을 대표해 단 "20명"만을
동해/독도 워크숍에 반크 외교대사 1기로 초청하였으며, 현직 외교관 및 동해/독도 전문가와 함께
1박 2일 동해/독도 전략 워크숍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모인 20명의 반크외교대사들이 동해와 독도 역사유적 1박 2일 탐방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반크외교대사들의 동해/독도 역사유적탐방을 통해 독도를 소개하고,

어떠한 역사적 유물들이 남아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포스팅은 독도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곁들여서 문화해설사님들의 문화유적에 대한 소개를

완벽히 재현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립니다!!




1. 독도의 역사

독도는 신라시대 512년 우산국을 복속시킨 이후 줄곧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시대 쇄환정책을 실시한 시기부터 독도와 울릉도를 무단 도해를 일삼다가
우리의 국력이 약화되어 일본에 우리의 주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시기인
1905년 시마네현 소속 은기도사 일본영토로 편입하고 죽도(다케시마)로 명명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의 모든 권리와 주권, 영토를 되찾게 되었지만,여전히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도에 대한 국제적 분쟁 발생시 명분을 쌓기 위한 일본의 다단계 전략으로 풀이되며,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독도에 관한 올바른 역사를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독도의 역사,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백과 독도) /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독도에 대해 간략한 역사를 알아보았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2편과 4편에서 정부의 독도/동해 정책 및 독도의 영토주권 근거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송휘영 교수님의 "일본 고문서에 나타난 일본의 독도 인식"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동해/독도 유적들을 하나씩 만나볼 차례인데요!
오늘 포스팅에서는 대풍헌, 이사부사자공원, 척주동해비, 동해신묘 순으로 유적으로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치채신 분도 계실텐데요. 대풍헌과 이사부사자공원이 독도관련 유적, 척주동해비와 동해신묘가 동해관련 유적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2. 대풍헌 待風軒, 바람을 기다리는 집

울진 대풍헌은 울릉도와 독도에 파견된 수도사들이 배를 타기 전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곳입니다.
대풍헌에 소장되어 있는 현판 및 각종 문서들이 문화재로 지정되고, 독도 영유권 문제가 국제적으로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면서 기념물로 등급 조정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에서 경상북도 기념물로 있는 문화재입니다.

대풍헌의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51년(철종 2)에 중수하고 대풍헌이라는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대풍헌 건물은 2010년에 중수한 것입니다.

<울진 대풍헌, 두산백과>


<대풍헌 문화재해설사님의 말씀>

1. "대풍헌은 조국을 사랑한 선조들의 애국심이 깃든 장소이다."
  대풍헌은 말 그대로 수도사들이 울릉도, 독도를 관리하면서 머물렀던 장소에요. 풍랑이 심하니까 100, 200여명의 군사들이 수도사와 함께 머물렀어요. 이런 점들에서 바로 조국을 사랑한 선조들의 애국심과 호국 혼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대풍헌의 스포트라이트, 그것이 궁금하다!"
 광복 60주년, 2005년에 대풍헌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수토했다는 [각주:1]문서가 나옵니다. 바로, 그게 [각주:2]완문

(完文)하고 [각주:3]수토절목(節目)이에요. 동국여지승람에는 그 당시 관리들이 울릉도, 독도를 수차례 순찰했다라는 정도로만 나와 있어요. 하지만, 완문에는 독도, 울릉도를 지키기 위해서 200년 동안 대풍헌을 유지, 수토교환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더 자세한 독도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완문의 내용은 "200명이나 되는 군사와 수도사의 의식주 관련 비용을 9개 마을이 유지하기 힘드니 군수님께서 도와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군수가 수토절목을 보내니, 그 내용으로는 "구산항에 입항하는 배에 한해서 입항세를 받고, 해안가의 어획물(해삼, 전복, 미역) 관리재량권을 하사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구산항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며, 현재도 대풍헌은 구산항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 "독도까지 1달? 수도사의 두려움"

 대풍헌에서 울릉도, 독도까지 맑은 날이면 5일이면 갑니다. 하지만, 날이 안좋으면 1달로도 부족해 제때 못가는 경우가 많아요. 자칫하다가는 가다가 풍랑을 맞아 죽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부임을 안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관아에서는 정말 가서 수토를 하고 왔는가라는 의구심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문화재해설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전에 어르신들께서 대풍헌 외방 궤짝에 있던 많은 고문서들을 너무 낡아서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그와중에도 완문과 수토절목 2권만 남아 현재까지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 문서들은 우리에게 "문서의 제작 당시인 조선 후기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였고, 정기적으로 순찰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3. 이사부사자공원 With 추암촛대바위


삼척 이사부사자공원은 시루뫼(증산)마을의 아늑한 해안 절경과 동해 추암 해변의 촛대바위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위치한 가족형 테마공원입니다. 공원에서는 아름다운 유리공예작품과 해안가의 바위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때 궁금증이 드실 수 있습니다! 이사부사자공원과 독도는 무슨 연관이 있느냐?
이 질문의 답은 이사부 장군에 대한 스토리텔링으로 알려드립니다!!

<실직국의 해상왕 : 이사부 장군>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우리 땅 한반도에는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실직(悉直)"이라 불리던 삼척은 신라의 영토로서 북으로는 고구려에, 동해로는 일본과 맞서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 였습니다. 신라 지증왕은 20대의 기상이 넘치는 장군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로 임명하여 특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동해의 요충지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신라의 영토로 복속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서기 505년에 실직군주로 임명 받은 이사부는 512년(지증왕 13년), 드디어 실직주 오십천 하구에서 우산국을 향해 출정하였습니다. 이때, 사나운 형상을 한 나무사자를 배마다 싣고 우산국을 정벌하러가 이사부 장군의 호령과 사자의 무서운 형상을 보고 공포애 휩싸인 우산국 우혜왕은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지증왕 13년(서기 512년)부터 우산국(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나라의 영토가 됩니다.

<출처 : 이사부사자공원 홍보물>



위에서 보신 것과 같이 우산국 즉, 독도와 울릉도를 정벌하러 갈 때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가져가 정벌했다는 내용에 따라 이사부사자공원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사부사자공원에는 나무사자상이 많았는데요. 특히, 나무사자상과 어울리는 바다 배경과 나무까지 아름다운 풍경이 언덕 위에서 펼쳐집니다!




이사부장군 영정(제83호 국가표준영정)부터 반크외교대사 단체사진, 넘어 바위를 배경으로 단장님과 외교관님까지. 1박 2일 워크숍의 추억이 스르르 지나갑니다!



이사부사자공원을 관람한 후에는 해변가를 걸어 추암촛대바위를 관람했습니다.



"미묘한 해안절벽과 함꼐 그리움이 배인 촛대바위,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동해의 거세고 맑은 물이 바위를 때리는 여운과 잘게 부서진 백사장이 아름다운 곳"


추암촛대바위는 동해시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으로서 한국관광공사의 겨울철 가볼만한곳 10선,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각각 선정되기도 한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입니다. 특히, 애국가 첫소절의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촛대바위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그 위엄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4. 척주동해비 With 육향산


척주동해비 비문은 삼척 부사 허목이 지은 것으로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넓이 76cm, 두께 23cm이다. 조류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당초에는 만리도에 건립되었다. 이후 숙종 34년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동왕 35년 부사 홍만기가 다시 새겼으며, 동왕 36년 삼척 부사 박내정이 죽관도 동쪽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에 이건하였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각의 전면에 "척주동해 비각" 제액과 후면에 "동해비각"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중국형산비의 대우수전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에 보관해 오다가 240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위의 설명이 어려우시죠?

그래서, 문화재해설사님의 스토리텔링으로 다시 설명해드립니다!!



<육향산 문화재해설사님의 스토리텔링> 


여기는 척주동해비는 비가 있는 곳이에요. 1904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가 다 항구였어요.

동해안의 가장 큰 자연항구가 여기였다라고 보시면 되고, 이곳에서 이사부장군이 울릉도도 정벌하셨어요.

근데, 우리가 일제를 겪으면서 도시개혁화를 하다보니까 여기가 다 매어졌어요. 그러니까 항구도 생기고, 여기는 예전에 죽간도라고 했었습니다.

 

또한, 안내문의 삼척포진성을 통해 삼척이 군사적인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척주동해비는 무엇인가?"

 동해안에 홍수가 나오잖아요. 조수가 해일로 인해서 죽서루가 50척 물이 넘어 피해가 극심하다 하여

 동방제일인자로 글을 잘쓰던 미수 허목부사님께서 동해바다를 달래는 비문()을 적어 동해 바다를 달랬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그 비를 정라항(옛 삼척항의 이름)의 만리도라는 섬에 48년간 두었어요. 그러다가, 허목부사(남인 중에 청남. 남인의 영수)님께서 좌천되면서 오시면서 서인 측에서 척주동해비를 부러트렸다 혹은 몸체에 효음이 있다해서 탁본을 해달라고 계속 요청이 오니까 귀찮았던 주민들이 일부로 떨어트렸다 등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없어지니까 피해가 계속 와서 다시 구해서 여기로 올렸다고 합니다. 허목 부사님이 미리 이런 것을 예측하였는지 종친이 미수사 동녘 마루 바닥에 숨겨놓았다고 해서 지금의 현 위치로 올렸습니다.


앞이 구본, 뒤가 신본입니다. 척주동해비는 우리 삼척의 옛 지명으로 보시면 되고, 처음에는 삼척을 [각주:4]실직국이라 하였습니다. 높이 175cm, 두께가 23cm, 넓이가 76cm입니다.


뒤는 신본으로서 천수를 누려 88세까지 사신 포목부사님꼐서 쥐뿌리로 썼습니다. 192자이며, 상형문자입니다. 척주동해비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액운을 막아주고 새로운 것이 행운이 온다라고 하여 삼척민들은 열쇠고리라든지 여러 가지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포목부사님이 이곳으로 좌천되어 왔을 때 썼으며, 주술적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척주동해비 내용>

바다가 넓고 넓어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끝이 없어라
동북은 사해여서 밀물 썰물이 없으므로 대택이라 이름했네

파란 물 하늘에 닿아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가 움직이고 음산하네
환한 저 양곡은 해 뜨는 문이라서 희백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석목의 위차요. 빈우의 궁으로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옛 성왕의 온대한 덕화에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을 통하여 모여드니 걱정하지 않은 이가 없구나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그 다스림이 넓고도 커서 유풍이 오래가리다.



2. "영장과 관찰사선정비와 비석머리문양"

이걸 보시면 선전비에요. 유래물망비

특히, 울릉도를 정벌하신 분들을 삼척영장이라고 하는데, 앞의 3개와 뒤의 두개는 영장. 중간에 두개는 관찰사 선전비이에요. 1916년도에 도시개혁화로 선전비를 지금의 현 위치로 모았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좋은 곳은 비문의 머리모양인데요. 이 비문의 머리모양이 아마 여기가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파도가 치고, 일출이 이는 문양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3. 백성들이 잘 살았으면 하는 염원의 대한평수토찬비

 대한평수토찬비는 높이가 145cm, 두께가 22cm 넓이 72cm입니다.

중국의 하나라를 처음 세운 우임금의 글씨로서 중국체입니다. 이것이 여기 왜 있냐하면, 조선 고종 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생활을 하잖아요. 그래서 1904년도에 광홍대라는 사람이 임금님의 칙사로 해서 이것을 세우게 되었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식민지를 겪으면서 백성들이 잘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염원에서 글씨체가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를 얻게 된 계기는 조선시대 선조임금의 아들 낭송군의 아들 인흥군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땅 속에 몇 천년 동안 묵혀있던 한 비를 찾아내게 되는 데 이 때 이 비의 글자가 71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흥군이 영천으로 이미 떠난 포목부사를 찾아가 이 글을 봐달라했더니 이게 과연 예사로운 글씨가 아니다.

그래서 48자를 목판에 새겼다. 그리고, 그것을 여기다가 옮긴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천자의 자손이 되가지고 우리 백성이 잘 살게 해달라는 뜻이 되겠는데요. 맥락에서 보았을 때에는 척주동해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두 비 모두, 나라/백성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이지요.

  

"집을 떠난지 오랫동안 임금님의 뜻을 받들어서 온갖 지혜 다 짜내어 규법을 만들었으니 물도 고요하고 땅도 안정이 되어 물에도 땅에도 고기와 짐승들이 형통하게 되었고 밝은 사회 이룩하여 영원토록 잘 살리라"라는 내용입니다.




5. 동해신묘 東海神廟, 동해신에게 풍노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


국가가 동해신에게 풍노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으로서 "동해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럼,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보기 위해서 동해신묘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 써보았습니다!


<동해신묘 스토리텔링>


1. "동해신묘는 양양의 동해신을 모신 곳이다?"

  아닙니다. 동해신묘는 고려 당시, 개성이 중심이 되어 개성의 정동인 양양에 동해신을 위한 동해신묘를 짓게된 것입니다.


2. "동해신묘는 동해용왕을 모신 곳이다?"

  아닙니다. 동해신묘는 동해용왕이 아닌 동해신으로서, 동쪽 바다를 관장하는 동해신을 모신 곳입니다.


3. "동해신묘는 강릉 정동에서 1490년대 (성종) 시기에 양양으로 옮겼다?"

  아닙니다. 동해신묘는 역사적으로 원래 양양에 지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는 '신승동국여지승람'으로서 양양편에 보게 되면 양양에 지었다는 역사적 근거가 있으며, 여지도서를 보게 되면 개성에서 정동인 양양에서 동해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강릉 정동에서 양양으로 동해신묘를 옮겼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본 이야기는 1968년 당시 양양교육장이던 김종국 교수가 1491년(성종 21년)에 강릉에 있는 수군만호(지금의 해군부대) 배의 입출항이 어려워 강원도 양양 조산지(현 동해신묘의 위치)에 1490년대에 옮겼다라는 주장과 함께 "동해신묘도 그 당시 같이 옮긴 것이 아닌가 본다"라고 써져 있는 것을 모 교수가 동해신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것은 원래 강릉에 있었는데 양양으로 옮겨왔다는 식으로 지속적으로 전파되어 잘못된 이야기가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4. "동해신묘는 국가의 제사터이다?"

   맞습니다. 동해신묘는 국가의 제사터로서 양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특히, 고려시대에 경우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부터는 국가제사터를 대사, 중사, 소사로 나뉘어 동해신묘는 중사에 해당하도록 제사방식을 변경하여 그 지역에 왕을 대신하여 관찰사가 내려와서 제사를 지었습니다.





5-1. 동해신묘중수기사비 東海神廟重修紀事碑


1800년 양양군수 남공철이 동해신묘를 중수하면서 세운 비입니다.


이 비에는 깊은 사정이 있는데요. 바로, 일제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입니다.

본 비석의 사진을 자세히 보시게 되면, 중간에 금이 가진 곳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1908년(순종 2년)에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으로 당시 양양군수가 동해신묘를 철폐하고 비석을 부쉬고 심지어 신주도 없애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이용당한 희생양이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18세기 기록을 보면 동해신묘는 정전(殿) 여섯 칸, 신문() 세 칸, 존사청() 두칸, 동재() 두 칸, 서재(西) 두 칸, 백천문() 한 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던 동해신묘가 현재의 크기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은 설명해주시던 어르신께서 따로 질문을 할 때 알려주셨는데요. 그 어르신께서는 동해신묘의 방치를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국가는 동해를 찾는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아라"라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참고 -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편, 양양동해신묘지>




이번 반크외교대사 1기 워크숍은 매우 뜻깊었습니다. 특히, 동해/독도 유적만 보더라도 그 역사를 깊히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무엇보다도 올바른 역사관을 중시해야 하는 현 사회에서 역사의 사료가 되는 문화재를 뒤돌아선 우리의 시각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라는 생각까지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기행이자 1박 2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동해와 독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때인 것 같습니다.

그냥 우리나라꺼니까, 그냥 일본이 싫어서가 아닌 자세한 역사를 알아보고, 알려주는 그러한 사람이 우리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만으로 독도를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독도를 자연적 가치로도 보는 다각적 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우리가 동해와 독도를 어떻게 생각하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때입니다.


긴 포스팅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 2편은 정부의 독도/동해 정책 및 독도의 영토주권 근거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구산동민들이 울릉도를 순찰하는 수토사 일행을 접대하는 데 드는 경비를 줄여 달라고 방책을 요청함에 따라 관아(삼척부)에서 결정한 완문(完文)과 절목(節目)이다. 삼척진영 사또와 월송만호가 울릉도를 3년에 한 번씩 수토하기 위해서 평해 구산리에서 출발할 때 바람이 심하면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에 관아에서 구산리 주변 9개 마을에서 경비를 충당하였는데, 마을마다 사정이 달라 민원이 자주 일어났고 그 해결방안을 관아에서 결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완문(完文) : 조선시대에 관아에서 백성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특전을 부여할 때 발급하는 문서 [본문으로]
  3. 수토절목(節目) : 수색하여 토벌할 때의 조항을 적은 것 [본문으로]
  4. 앞에서 이사부 장군과 관련된 일화를 <실직국의 해상왕 : 이사부 장군>이라고 스토리텔링 식으로 소개한 적이 있음. [본문으로]